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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작가

시오노나나미의 로도스 섬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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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꽃 피는 로도스 섬에서 16세기 초를 살았던 많은 기사들이 다른 이름의 신을 섬기는 투르크족을 맞아 공방전을 치르면서 푸른 피를 바치는 젊은 카데토(cadetto)들의 이야기

1. 제목 및 저자 소개 

 로도스 섬 공방전 -시오노 나나미


시오노 나나미는 1937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4년에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그 후로 오랜 세월을 혼자 공부했다.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의 역사현장을 직접 취재하며 로마사에 천착했다. 도전적 역사해석과 소설적 상상력을 뛰어넘는 놀라운 필력으로 전 세계의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처녀작 '르네상스의 여인들'을 시작으로 수많은 작품이 있으며, 필생의 역작 '로마인 이야기' 전 15권을 마쳤다.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바다의 도시 이야기'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신의 대리인'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 '남자들에게' '사일런트 마이노리티'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 ' 살로메 유모 이야기' '그리스인 이야기 1,2,3' '시오노 나나미의 국가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의 리더 이야기' '십자군 이야기 1,2,3' '어부 마르코의 꿈' '콘스탄티노플의 뱃사공'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상, 하 '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이탈리아에서 보내온 편지 1,2' '주홍빛 베네치아' '은빛 피렌체' '황금빛 로마' '사랑의 풍경' '마키아벨리 어록' '침묵하는 소수' '콘스탄티노플 함락' '로도스 섬 공방전' '레판토 해전'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 '바다의 도시 이야기 상, 하' '로마인에게 묻는 20가지 질문' '신의 대리인' 등이 있다. 

 

2. 이 책을 읽게 된 동기 

 

나의 전작주의의 대상인 된 시오노 나나미의 책 50 여권 중 41권 정도 읽었는데 그 중 한 권이어서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책은 나로 하여금 지중해 세계로의 초대를 촉구하는 작가였고 아직 이루지는 못했지만 꼭 지중해 세계로의 여행을 꿈꾸는 발판이 되어준 사람이기도 했다. 언제가부터 대화를 나눌 때면 언제나 나의 꿈은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를 비롯 콘스탄티노플 및 지중해 세계로의 여행이라고 떠들고 있다. 혹시 아는가!! 누군가 먼저 지중해 세계를 경험하고, 그곳을 경험하기를 기다리는데 그 쪽 역사를  알고 있고 같이 여행을 꿈꾸는 방랑객을 찾고 있을지!! 그런 사람도 있긴 했다. 전 세계 지역 27군데를 다녔던 사람으로 같이 여행을 가자라는 분!! 헉!!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대화만으로!! 전혀 준비가 안된 나에게!! 기분은 좋았다. 같이 가진 못했지만... 그래서 다국적 인물들이 대거 오가는 이곳에서 대화가 이어지기만 하면 나는 다시 외친다. 오늘도! 지중해 지역으로 여행의 꿈을!!




 

 

 

 

3. 글쓴이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줄거리)

 

무   대 : 로도스섬, 1522년

주인공 :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28세), 잠바티스타 오르시니(25세), 안토니오 델 카레토(20세)

 

1. 장미꽃 피는 옛 섬
 16세기 초 소아시아의 남안, 로도스 섬은 동쪽에 있는 키프로스 섬과 나란히 이슬람 세계에 대한 기독교 세계의 최전선을 이루고 있었다.
무화과 열매를 남북으로 길게 띄워놓은 모양이다. 원주민은 그리스인들이나 서유럽 상인들이다. 먼 옛날 온 섬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을 장미꽃은 1,500년이 지난 지금은 눈에 띄지 않았다.

2. 성 요한 기사단의 역사 

 9세기 예루살렘이 이슬람교도의 지배하에 있을 때 아말피의 부유한 상인 마우로는 예루살렘을 찾는 성지 순례자를 위해 병원 겸 숙박 시설을 지었다. 꼭지점 여덟 개의 변형 십자가의 성 요한 기사단의 문장의 기원은 아말피의 문장이다. 11세기 기독교도가 지배하게 된 예루살렘에서 신약성서의 저자 중 한 사람인 성 요한을 수호성인으로 모신 조직이다. 청빈, 복종, 순결이 의무조항이었다. 

 

3. 그리스도의 뱀 소굴 

 1453년 비잔틴제국 멸망과 1517년 시리아 및 이집트의 정복이 후 투르크 군의 내해가 된 동지중해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이슬람의 목에 가시였던 로도스 섬의 기사들은 해적화 된 기사들로서 그리스도의 뱀으로 간주되었고, 로도스 섬은 이슬람교도에게는 뱀의 소굴이었다.

 

4. 개전 전야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은 전쟁의 역사를 바꾼 좋은 예였고, 대포의 활용이 이후의 축성 기술, 즉 전술 전반을 바꿔놓은 것이었다. 대군을 투입하여 승리함으로써 대군주국 시대로의 이행을 강제한 것 등 역사적 변혁을 수반한 전쟁이었다.

 

로도스 섬 공방전은 이 두 가지 면에서 70년 전 사건의 파장이 전면적으로 밀려온 최초의 전쟁인 셈이지만 유럽 사람들 중에는 이 작은 남쪽 섬에서 일어나고 있던 새로운 흐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5. 1522년 여름 

 로스섬 공략을 위해 투르크 해군이 집결이 완료된 때는 1522년 6월1일로 300척 규모였다. 비슷한 시기에 육군은 병력 10만. 거기에다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200척의 배와 10만 병사였다. 이에 맞서는 기사단은 600명이 안 되는 기사와 1,500명 남짓한 용병과 로도스 주민 중 참전 가능자 3천 명 가량이었다.

 

 투르크 전군의 로도스 섬 상륙은 7월 28일, 쉴레이만 1세가 상륙함으로써 완료되었다. 물량 공세로 2개월을 총 공격하던 9월 24일의 태양이 떠오르기 전, 투르크 군의 전 전선 총격이  시작됨으로 총 6시간이 지난 뒤에야 간신히 공방전이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끝끝내 로도스 성벽은 방어되었다. 

 

6. 1522년 겨울 

 28살의 쉴레이만은 이번 기회에 사태를 종결시켜야한다고 생각했고, 관성처럼 또 한 번의 총공격이 행해졌던 11월 29일일 저녁나절, 술탄의 친서가 매달려 화살이 기사단 쪽으로 날아왔다. 항복을 권하는 친서였고, 저항이 계속되면 함락 후 전 주민이 죽음을 당할 거라는 엄포와 함께 명예로운 항복을 허락하겠다는 글도 있었다. 명예로운 항복이란 방위 측이 원할 경우 섬을 떠나도록 허락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되었다.

 

 모든 로도스 인이 항복을 원했지만 오베르뉴의 기사, 기사단장 비서관인 라 발레트만 로도스를 버리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지언정 기사단의 존재 이유를 잃게 된다는 이유로 확고한 어조로 결사 항전을 주장했다.

 

기사단장 릴라당은 휴전을 청하고 특사를 뽑아 투르크 진영으로 보냈다. 10가지의 투르크 군의 약속을 받고 특사가 돌아왔다. 휴전기간이 끝났지만 소식이 없는 방위군 측으로 12월 16일 다시 포격이 시작되었다.

 

 12월 18일 로마의 기사 오르시니는 스물다섯 해로 짧은 삶을 마쳤다. 12월 19일 밤 기사단장은 술탄이 제시해온 조건에 따라 문을 연다는 결정을 내렸다. 12월 25일 항복 문서가 조인되었다.

 

 술탄을 방문한 기사단에게 "나는 이겼소, 하지만 귀관과 귀관의 부하들 같은 용감하고 의로운 이들을 거처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게 못내 슬픈 것만은 어쩔 수가 없다오." 젊은 승자를 바로 보는 기사단장의 눈에 만감이 교차했지만, 끝내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12월 29일 쉴레이만은 통고대로 로도스에 입성했고, 젊은 술탄은 휘하 병사들에게 패자를 업신여기는 자는 중형에 처하리라 통고했고, 이 지시는 완벽히 지켜졌다.

7. 방랑시대

 1523년 1월 1일  200년 동안 그들을 포근하게 안아주었던 장미꽃 피는 옛 섬을 기사단과 로도스 섬 주민들은 떠났다. 일단 목적지는 크레타 섬 서쪽 끝에 있는 카네아 항구로 정해졌다. 서유럽인과 로드스 인들은 살 곳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고, 문제는 기사 개인이 아니라 기사단이라는 조직을 받아줄 땅을 찾아 나서야 했던 성 요한 기사단이었다. 4월 성 요한 기사단은 시칠리아의 메시나로 옮겼다가 제노바로 가기도 하고 니스에 머물다가 비테르보에 머무는 떠돌이 생활을 겪었다.

 

 기사단장 릴라당은 서유럽 궁정을 돌면서 로도스 수복을 위한 십자군을 결성하자는 호소를 멈추지 않았지만, 군주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적어도 어디 한 군데 본거지로 삼을 땅이라도 달라고 군주들에게 요청했고, 1530년 카를로스는 지중해에 조그만 섬 몰타와 그에 딸린 작은 섬 두 개를 매년 매 한 마리를 조공으로 바친다는 조건으로 기사단과의 교섭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기사단은 몰타 섬을 영유하는 한 에스파냐 왕의 신하로 남아 북아프리카의 트리폴리를 공략해야 한다는 의무를 떠안게 되었다. 그해 기사단의 몰타 이주가 완료되었다.

8. 몰타 기사단 

 몰타는 대부분 문맹이고 아랍어 방언을 쓰는 주민 1만 정도의 섬이었다. 기사단장 릴라당은 이주한 지 4년 뒤 숨을 거두었다. 로도스섬에 비해 황폐한 섬 몰타를, 기사들은 무인지대인 그곳을 요새 화하는데 착수했다. 1557년 27년이 지났을 때 몰타 섬 요새화는 반쯤 완성되었다. 그 해 성 요한 기사단장으로 선출된 사람이 장 파리소 드 라 발레 트였다. 로도스에서 쫓겨난 이후로 투르크에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한시도 버리지 않았던 그였다.

 

 1565년 투르크는 몰타 공략을 위해 대군을 파병했다. 쉴레이만은 신하에게 그 일을 맡겼다. 43년 만의 투르크 제국 대 성 요한 기사단의 재회였다. 방위 측은 540명의 기사에 에스파냐 병사 천 명, 용병 및 몰타인 4천 명,  투르크 쪽은 로도스 공격군보다 전력이 1/2이었고, 로도스까지의 거리보다 몰타는 두 배 이상 거리었고, 몰타 기사단의  방위 태세가 몇 개의 반도에 구축해놓은 요새에 근거한다는 점이 불리하게 작용했다.

 

 몰타가 펠리페 2 세령의 시칠리아와 가까워 1만 6천 명의 원군을 보내기로 되어있는 것도 불리한 조건이었다. 공방전 넉 달째인 9월 6일 몰타를 떠나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간 투르크 군은 출전 때의 3분의 1밖에 안 되었다. 그 후 쉴레이만 대제는 1년 뒤 세상을 떠났다. 라 발레 트는 3년 후 세상을 떠났다. 기사단에 의해 요새화 된 이 일대는 자연히 섬의 수도가 되었고, '발레타'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다. 성 요한 기사단이 나폴레옹에게 패하여 섬을 떠난 뒤에 몰타 섬은 프랑스령이 되었다가 이어서 영국령이 되었는데, 독립 공화국이 된 오늘날에도 수도만은 여전히 '발레타'라 불리고 있다.

 

9. 또 하나의 선택 

 안토니오 델 카레토는 몰타 섬을 본거지로 삼으면서 몰타 기사단의 일원이 아니었다. 몇 년동안 기사단과 난민 생활을 하다가 기사단을 탈퇴한 것이다. 기사 신분을 버리고 안토니오가 수도원에서 평범한 수도승 생활을 하면서 로도스 공방전에 관한 기록을 남긴 듯하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안드레아 도리아의 양자가 되어 해군 장수로 입문한 동생과는 달리 수도원을 나온 그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로 가서 해적에게 붙잡힌 기독교도 노예를 돌보는 것이 그가 선택한 일이었다.

 

10. 성 요한 기사단 -그 이후  

 1798년 6월, 몰타 섬의 성 요한 기사단은 이집트 원정길에 오른 나폴에옹에 의해 몰타에서 추방되었다. 몰타 기사단은 나폴레옹의 함대에 순순히 항복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실각하면서 영국 영토가 되었다. 기사단은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독립했다. 독립국 몰타의 문장은 성 요한 기사단의 팔각 변형 십자이고 수도는 발레트이며 기사단이 쌓아 올린 요새는 그 뒤에 해군 기지로 활용되었고, 나토나 소련, 리비아가 탐내는 곳이기도 했다. 

 

 십자군 시대부터 세 번째 난민 시대를 겪은 성 요한 기사단은 몰타를 떠난 뒤 모스크바에 잠시 머물렀다 1826년  북이탈리아의 페라라로 이전했다. 그 뒤 로마로 옮겼다. 기사단의 일원이 로마 중심가에 소유하고 있던 건물을 기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로마에서 가장 멋진 거리인 콘도티 거리에는 지금도 성 요한 기사단의 본부가 있다. 현 기사단장은 77대째 단장으로 8천 명의 기사가 있다. 1988년에는 78대 기사 단장이 취임하기도 했다.

 

 성 요한 기사단은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점인데, 이슬람교도를 상대하는 전사는 사라졌지만 기사단의 또 하나의 임무였던 의료 활동은 남은 것이다. 실로 900년 만에 성 요한 기사단은 아말피 상인이 이스라엘에서 창설했던 당시의 사명으로 돌아간 것이다.

 

 

● 로도스섬 공방전을 전후한 투르크와 서유럽의 상황

 25살에 술탄에 오른 쉴레이만 1세는 1517년에 대정복 사업이 일단락 되면서 메카까지도 영유하게 됨으로써 이슬람의 정신적 맹주가 되었다. 이런 상태의 쉴레이만 1세에게는 동지중해를 완전히 내해로 만든 그에게 로도스는 즉위하자마자 제거해야만 했던 가시 같은 존재였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계기로 동방의 투르크제국의 공격에 직면한 서유럽도 역시 중앙집권적인 대국주의를 확립함으로써 이에 맞서려 했던 시기였다.

 

 그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영국의 헨리 8세 등이 서로 치고받는 재편기에 로도스 섬 공방전이 일어났기 때문에 투르크의 10만 대군에게 포위된 로도스 섬의 성 요한 기사단을 도울 수 없는 상태였다.

 

 근대화된 대포로 무장된 투르크 군과 대결한 것은 서유럽의 차남들로 구성된 카데토들이었던 중세의 전형적 산물로 불리는 성 요한 기사단이었다.

 

 서유럽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로 싸울 수밖에 없는 성 요한 병원 기사단이었다. 교황청은 레오 10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교황이 공석인 상태였고, 혹시 누가 교황청의 주인이 되든 간에 루터의 파문 뒤로 공공연히 활동하고 있는 루터파에 대한 대책이 지상 과제로 간주되고 있던 때였다. 이교도 투르크한테 어떻게 대처한다는 것은 나중 문제였던 것이다.

 

4. 내 영혼을 깨우는 구절들

   

 

● 아말피의 부유한 상인 마우로는 예루살렘을 찾는 서유럽의 성지 순례자를 위해 병원 겸 숙박 시설을 지었다. 훗날 성 요한 기사단의 문장이 되어 현대에도 쓰이고 있는 꼭지점 여덟 개의 변형 십자가는 굳이 기원을 따지자면 바로 아말피의 문장이었다.

● 1099년 제1차 십자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정복당하면서 성묘교회에서 돌을 던지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성 요한을 수호성인으로 모신 이 기사단은 4년 뒤 교황 파스칼리스 2세에 의해 종교와 군사 및 병자 치료에 봉사하는 종교 단체로 공식 인가했다. 이로써 '성 요한 병원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1130년에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가 성 요한 기사단에 군기를 하사했다. 

● 1119년에는 순 군사적 종교 단체인 성전 기사단이 창설되고, 1190년에는 튜튼 기사단이 창설되었다. 이 기사단들의 위용과 화려함은 서유럽 왕후들과 동석해도 눌리지 않았고, 1291년까지는 종교 기사단의 황금 시대였다.

● 몰락하는 계급은 언제나 새로 대두되는 계급과 전쟁을 치르고서야 완전히 사라지는 법이다.

● FERT FERT FERT : 참고 견디라

● 기록을 남긴다는 행위는 무의식 중에 내일을 생각하기에 비로소 나오는 것이다. 내일을 생각하는 것은 건전한 정신의 발로이기도하다.

● 성 요한 기사단은 성전 기사단이나 튜튼 기사단과는 달리 병자 치료에 봉사하는 것으로 출발한 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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