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3년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둘러 싼 술탄 메메드 2세의 공방전이 전개된 56일의 이야기
1. 제목 및 저자 소개
콘스탄티노플 함락-시오노 나나미
시오노 나나미는 1937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4년에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그 후로 오랜 세월을 혼자 공부했다.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의 역사현장을 직접 취재하며 로마사에 천착했다. 도전적 역사해석과 소설적 상상력을 뛰어넘는 놀라운 필력으로 전세계의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처녀작 '르네상스의 여인들'을 시작으로 수많은 작품이 있으며, 필생의 역작 '로마인 이야기' 전 15권을 마쳤다.
2. 이 책을 읽게 된 동기
콘스탄티노플 함락이라는 책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이 도시가 뭐그렇게 중요한 위치에 있는가라는 어이없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 책을 처음 손에 들었던 때는 지금으로부터 20 여년 전 어느 날이었다.
역사와 세계사를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책에 나온 모든 지도를 복사해서 하나하나 짚어가며 책장을 넘겨서 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머리 속에만 저장 되어있던 책들 중 꼭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책들을 골라 다시 기억들을 되살려보고 싶고, 일기 형식으로 남기고 싶어서, 이 책을 다시 읽고 쓰게 되었다.
3. 글쓴이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줄거리)
주인공 : 콘스탄티노플, 술탄 메메드 2세
요 약 : 천년이 넘게 동, 서문화의 요충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이 21세의 젊은 술탄 메메드 2세에게 정복당하면서 겪게 된 56일의 공방전의 기록
시오노 나나미는 16살, 여름날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통해 지중해 세계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 책을 보고 뭔가 막막한 감정을 느꼈고, 그녀의 글쓰기는 이런 막막한 감정을 분명히 그려내고 싶은 시도로부터 시작한 것 같다고 했다.
열여섯 살부터 이 세 전투, 콘스탄티노플 함락, 로도스섬 공방전, 레판토 해전을 써야지했던 것은 아니고, 그로부터 25년이 지나 베네치아공화국의 통사인 바다의 도시 이야기를 준비할 때였다고 한다.
베네치아에 남아있는 상세하고 객관적인 사료들을 공부하는 동안 열 여섯의 그 여름날 이래 가슴 속에 품어던 지중해를 무대로, 전쟁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과 맞아떨어진 것이 전쟁 3 부작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천재 호메로스가 쓴 호메로스의 방식을 따라 글을 쓰고 싶었지만, 이 세 전쟁은 트로이 전쟁처럼 10년 동안 벌어지면서 싸운 전쟁이 아니므로,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50 여일에는 50 여일에 어울리게,
로도스 섬 공방전은 6개월 정도이므로 6개월에 어울리게,
그리고 레판토 해전에서는, 5시간에 치닫는 부분은 크레센도로, 5시간 지난 뒤에는 데크레센도로 썼다고 했다.
세계의 도시 중 콘스탄티노플은 서기 330년 5월 1일을 기점으로 그때까지 쓰던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창립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인 콘스탄티노폴리스라 불리기 시작했다.
비잔틴제국이라고도 불리는 동로마제국,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로마제국의 1123년 간의 수도가 된다.
1453년 5월 29일 멸망하는 그 날까지.
전성기는 6세기에서 10세기 사이였고 인구는 100만이라 일컬어졌다.
그러던 것이 15세기에는 10만도 될까말까 한 정도로 줄어든다.
15세기 르네상스 문명의 창조자가 된 당시 이탈리아인들이 보기에 비잔틴인들은 정신의 문제인 종교와 지상의 문제인 정치를 분리하려 하지 않는 중세적인 비합리주의자들의 떼거지였고,
종교 토의에만 열중할 뿐 공동체의 효율적 운영에 필수불가결한 적극성과 협조의 정신이 전혀 없고 미신에 쉽게 동요하는, 한마디로 정말 칠칠치 못한 민족일 뿐이었다.
영토면에서는 투르크에 포위되어 있으며 군대는 없는거나 마찬가지고, 경제적으로 서유럽 상인 국가들에 지배당하고 있던 15세기 비잔틴제국을 이끌던 황제가 우연히도 창립자와 이름이 같은 콘스탄티누스 11세였다.
동로마제국 최후의 황제가 된 그는, 스러져가는 우아한 문명을 체현하는 듯 명예를 중히 여기되 온화한 성품을 잃지 않는 마흔아홉의 세련된 신사였다.
결혼을 두 번이나 했지만, 두 번 다 황후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슬하에 자식도 없었다.
바로 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들과는 다르고, 오리엔트 문명을 충분히 흡수하면서도 자기만의 독자성을 지켜온 비잔틴 문명의 상징, 콘스탄티노플을 지키라는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상대는 갓 스무 살난 투르크 청년이었다.
1,300 년대를 전후로 소아시아 내륙부 아나톨리아에서 세력을 결집하기 시작한 오스만 투르크 민족은 아무도 주목받지 않은 채 28년후에는 마르마라해에 인접한 도시 부르사를 정복했다.
1354년 아시아가 아닌 유럽의 끝자락인 갈리폴리 함락, 서유럽안에서 벌어진 내분에 힘을 쏟아야 했던 베네치아와 제노바라는 양대 해양 세력 모두가 이에 대처할 기회를 놓치고 있는 동안 발칸 지방을 향한 투르크의 진공은 추진되고 있었다.
1362년 아드리아노폴리 함락, 1363년 필리포폴리 낙성 트리키아 지방이 완전히 투르크의 수중에 떨어진 셈이다.
콘스탄티노플만으로 움츠러든 비잔틴제국을 온존시키는 것이 제일 낫다는 분위기가 15세기 전반기에는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잔틴제국도 서유럽 세력도 그즈음 소아시아 땅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생애에 이상할 정도로 관심이 많은 한 청년이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메메드 2세 (무하마드 2세)는 1432년에 투르크의 수도 아드리아노폴리에서 술탄 무라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두 형이 갑자기 죽게되면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후, 19살에 술탄이 된 메메드 2세는 선대부친이 맺은 서유럽과의 조약들을 그대로 갱신 했다.
그랬기때문에 위대한 무인이자 의로운 사내로 불리운 메메드 2세를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 유산을 지키는 데 온 힘을 쏟을 그릇이라 평가했다.
하지만 적으나마 낙관할 수 만은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1세였다.
그는 투르크와 비잔틴 간의 상호불가침조약이 갱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메메드 2세 즉위 후 불과 한 달 만에, 서유럽 세계에 원군 파견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육지 쪽만 6킬로미터, 금각만 쪽이 5킬로미터, 마르마라해 쪽이 9킬로미터에 가까운, 적어도 21킬로미터에 달하는 전체 성벽을 지키기에는 35,000 명을 넘지 않는 콘스탄티노플의 주민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반면 투르크군은 15만 병력이었다.
상황은 메메드 2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서유럽은 비잔틴 제국의 구원에 나설 마음이 없었고, 육로로 원군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기독교국인 헝가리는 이미 동맹조약을 맺어 메메드 2세로부터 움직임을 봉쇄당한 상태였다.
황제의 두 동생도 대투르크 방어전을 간신히 이끌고 있었다.
투르크의 유일한 약점인 해상 전력에서 투르크보다 훨씬 우세에 있는 베네치아나 제노바가 움직이기를 주저하고 있으니, 다른 서유럽 세력만 움직이지 않는다면 콘스탄티노플의 고립은 확정적이었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도 더 메메드 2세는 평정을 찾은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1453년 1월 메메드 2세는 투르크 전역에 공식 동원령을 발했다.
거기에다 콘스탄티누스 11세에게 거절당했다던, 우르반의 거포라 불리는 대포의 실험이 메메드 2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행해졌다.
자국의 상업 이권을 지키려하는 베네치아, 나라의 존망이 갈리는 때에 교리 논쟁으로 날을 지새우는 비잔틴인, 중립 지대를 선포한 갈라타 지구의 제노바인, 남일이야 발뺌하는 서유럽인들이 서로 갑논을박하는 콘스탄티노플의 당시 모습이었다.
믿을 수 있는 황제의 측근을 통해 전투에 필요한 갑주 및 무기를 지닌 성년 남자의 수가 겨우 4,713명밖에 되지않는 다는 보고를 받는다.
서유럽인 2천명을 더해도 7천 명밖에 되지않았다.
콘스탄티노플 도시의 400미터 앞까지 전진을 명령한 술탄 메메드2세는, 콘스탄티노플 도시안에도 대포는 있지만 무용지물이라는 제노바인의 정보을 듣고 전진 배치를 명령했던 것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12구의 대포는, 1453년 4월 12일 아침 햇살이 흩뿌리는 온기를 신호로 삼은 듯, 투르크군의 포구가 차례차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 굉음은 이후 7주간이나 계속되었다.
포위전은 4월 4일부터 시작되었다.
포위가 시작된 날로부터 15일이 지난 4월 18일에 메메드 2세는 총공격을 명한다.
해전에서 완패해 굴욕을 당한 술탄은 해군력의 열세를 만회할 뿐만 아니라 우세로 바꿔버릴 방책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갈라타 지구 육지에다 궤도 설치를 한 후 소떼로 하여금 보스포로스 해협에서 배를 통째로 옮겨 갈라타지구를 통과해 금각만으로 배를 이동시키는 것.
거기에다 금각만 안쪽으로 부교를 놓아 상상에 상상을 넘어 공격하는 술탄 메메드 2세 앞에 천년의 도시는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다.
술탄은 비잔틴 황제에게 항복의 조건으로 10만 비잔틴 금화와 황제의 퇴거를 요구했다.
하지만 황제는 거절했다.
오지않는 지원군을 기다리며 비잔틴제국의 찬란한 영광을 한 몸에 안은 콘스탄티노플은 아나톨리아 산악민들이 쏘아대는 포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그 속에서 베네치아인과 제노바인의 해묵은 반감이 다시 폭발했다.
6일 후에 도착할 지원함대의 소식을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아무도 알지못한채 수비군은 점점 무너져가고 있었다.
5월 28일 마지막 예배에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설교를 한다.
자신의 신앙, 조국, 가족, 주군을 위해 죽음도 달게 받을 각오를 항상해야한다며, 자신도 백성과 운명을 같이할 것이다라는 말과 눈물과 함께 신뢰를 담아 서로를 껴안는다.
그리고 각자의 수비의 위치로 돌아갔다.
방위군은 교대 한 번 못 한 채 연신 밀려오는 적에 맞서 싸우면서 버티다가 총지휘관 주스티나아니가 목에 화살을 맞는 것을 기화로 수비군은 무너졌고, 예니체리 군단 병사들은 전원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성벽으로 돌격했다.
그들은 더 이상 격퇴당하지 않았다.
방위측은 이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고 탑 위에서 휘날리던 제국 깃발과 베네치아 국기가 내려가고 그 자리를 하얀 초승달이 그려진 붉은색 투르크 국기가 대신하는 것이 보았다.
황제는 주홍색 망토를 버리고, 제위를 나타내는 문장도 벗어던지고 검을 뽑아들고 눈사태처럼 밀려오는 적군 한가운데로 모습을 감췄다. 두 기사가 뒤를 따랐다.
1453년 5월 29일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을 때 콘스탄티노플을 탈출하려는 사람들로 선착장은 순식간에 발 디딜 틈도 없어졌다.
오후 두 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 8척의 배에 가득탄 사람들은 기독교를 믿는 로마인의 도시, 콘스탄티노플를 눈을 떼려하지않은 채로 이 도시에서 멀어져갔다.
남아있는 콘스탄티노플에서는 3일 간의 약탈이 일어났고, 4천 여명이 살해되었다.
56일 동안 흑마를 타고 다녔던 메메드 2세는 이제 자신의 도시가 된 콘스탄티노플에 콘스탄티누스 11세가 타고 다녔던 것이 부러웠던지 백마를 타고 그 도시에 입성했다.
저항의 총소리 하나 나지 않았고 정복된 사람들 중에 말 앞을 막아서는 사람 하나 없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술탄 메메드 2세 앞에 완전히 굴복한 것이다.
비잔틴제국은 지상에서 소멸하고 그 자리에 투르크제국이 출현했다.
이렇게 야심에 도취된 풋내기, 잘 봐줘도 선대 술탄이 남긴 영토를 현상 유지하면 다행인 그릇 정도로 평가되던 메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이라는 사건으로 일세를 품미한 영웅으로 바꿔놓았다.
1481년 5월 3일 마흔아홉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 까지 숨막히게 서유럽인의 땅들을 정복해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시리아와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 그리고 이집트의 공략을 앞두고, 여러가지로 재능이 뛰어난 메메드 2세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전 유럽에 전해지자, 그들은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리고, 불꽃을 날리며 기뻐했다.
투르크제국은 16세기 중반 쉴레이만 대제 때 절정을 맞이하고 20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이런 모든 번영의 기초는 콘스탄티노플 공략이 바탕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4. 내 영혼을 깨우는 구절들
● 행복은 사람들의 마을을 열게 하지만, 불행 또한 그럴 때가 있는 법이다.
● 성공은 고생을 잊게 한다.
● 초현실적인 것에 의지하는 사람은 다른 초현실적인 것에 마음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비잔틴제국은 첫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이름이 같은 황제의 치세 기간에 멸망한다는 예언을, 그 들 마음속에 떠올리기 시작했다.
● 19세기에 이르러, 400년에 달한 투르크 지배에서 독립한 그리스인 등 그리스 정교도가 얼마나 끈질기게 신앙을 지켰는지를 보면, 나라를 위해서라면 종교상의 타협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동,서 교회의 연합파보다는 신앙의 순수함과 통일을 위해서라면 나라의 멸망까지도 감수해야 한다고 믿었던 그리스 정교파 쪽이 옳았던 게 아닐까.
● 광신을 배격하는 입장에서 보면 암담한 기분이 들지도 모르지만, 사리를 따지기 전에 무조건 믿고 보는 광신이 신앙을 시키는 데, 더 쓸모있었던 예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인 것이다.
●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베네치아 거류구는 40만 두카토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다고 하지만, 제노바의 피해는 적게 잡아 50만 두카토, 부동산까지 포함하면 100만을 가볍게 넘어서는 것이었다.
라이벌 제노바와의 경쟁을 피해서 동지중해 무역의 거점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옮긴 베네치아와 달리, 콘스탄티노플과 흑해에 전력을 투구해온 제노바의 통상은 비잔틴제국이 멸망함으로써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 대포라는 신병기의 출현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강철 갑주로 무장하고 전투의 전문가라는 자긍심으로 살아가던 중세 기사계급을 완벽히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해외작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존그레이의 화성남자 금성여자의 사랑의 완성 (0) | 2021.02.24 |
---|---|
시오노나나미의 로도스 섬 공방전 (0) | 2021.02.06 |
시오노 나나미의 마키아벨리 어록 (0) | 2021.01.23 |
시오노 나나미의 신의 대리인 (0) | 2021.01.07 |
시오노 나나미의 세 도시 이야기 중- 황금빛 로마 (0) | 2020.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