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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신의 대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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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를 살다 간 4명의 신의 대리인 이야기 : 비오 2세, 알렉산데르 6세, 율리우스 2세, 레오 10세

 

1. 제목 및 저자 소개 

 

신의 대리인-시오노 나나미

 

시오노 나나미는 1937년에 일본에서 태어났다. 귀족들이 다닌다는 학습원 대학교를 마치고 로마로 건너간다. 로마에서 어느 곳에도 적을 두지 않고 혼자서 공부했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곳 로마에서 40년 이상 로마사의 연구에 몸을 바친다.  그녀로 인해 로마사에 궁금증이 많은 세계의 독자들은 역사속 인물들과 대화하듯이 그녀의 책들을 읽어갈 수 있게 되고, 역사의 현장에 있는 것 처럼 써내려가는 그녀의 필력에 독자의 궁금증은 하나씩 채워짐을 느낀다.

 

 2. 이 책을 읽게 된 동기

책 제목이 나에게는 굉장히 선정적이었다. 아무것도 모를 시절 신의 대리인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라며 궁금했었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의 작품이라 더욱 읽고 싶었다. 지금은 많은 세월이 흘러 대충은 르네상스 시대와 역사에 대해서 줄기라도 파악해서 다시 읽어보니 흥미롭지만, 20년 전에는 읽기 쉽지 않았다. 전적으로 역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적으로 소설도 아닌 그래서 읽기 따분하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기억도 나지않았다. 지금은!! 어떤가 !! 너무 흥미진진하다 아! 르네상스 시대의 4명의 교황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온다. 신을 대신하는 교황의 이야기들. 그런데 누가 21세기에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 이야기에 관심을 있을까하면서도.. 가끔은 나와 같은 사람이 있을 것도 같아서 기록으로 줄거리를 남겨볼 마음이 생겼다.

 

 

 

 

3. 글쓴이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줄거리)

누   가 : 르네상스 시대의 4명의 교황 

               (비오 2세, 알렉산데르 6세, 율리우스 2세, 레오10세)

언   제 : 르네상스 시대인 15~16세기 경 

어디서 : 로마 교황청

 

1. 최후의 십자군
 비오 2세 (1458-1464)

34년 후 자신 역시 로마 교황이 된 로드리고 보르자 추기경이 이제 막 추기경에서 로마 교황 즉, 신의 대리인의 자리에 오른, 마지막 십자군을 꿈꾼 비오 2세를 근접 거리에서 바라본 이야기.

시대 배경은 마지막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던 때로부터 250년이 지난 1458년 8월 19일 비오 2세에게는 53세에 맞이한 빛났던 하루, 여름 로마이다.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 비오 2세 그는 인문주의자로 이름이 높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초청으로, 빈에 가서 황제로부터 계관 시인의 월계관을 받을 정도로 인문주의자로 이름이 높았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밀라노 공국의 영주는 칼로 공국을 얻었다면, 에네아 실비오는 오직 두뇌만을 무기로 삼아 기독교  세계의 최고 지위를 손에 넣었다. 그런 인문주의자였던 그가 막상 교황이 되자 터키 지배 하에 놓인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기 위해 무모하게 십자군을 일으키는데 목숨을 바치기를 원한 것이다.

 

그 당시 서유럽의 기독교 세계는 내우외환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하나는 제각기 국력을 증강해온 유럽 국가들이 세속 권력을 지배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성직계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 왕을 가장 경계해야했다. 교황령을 포함한 이탈리아에 대해 영토적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위를 보유하고 있는 독일도 안심할 수 없다. 황제의 위세는 전보다 약해졌지만, 문제는 그 때문에 오히려 힘을 갖기 시작한 독일 제후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내부 문제보다 더욱 절박한 위기감을 초래한 것은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터키의 위협이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이미 함락 직전에 놓여 있었고, 아테네와 코린트마저도 함락되었기에 서유럽 기독교 세계가 깜짝 놀라게 된 것이다. 유럽 국가들은 이 강대한 이교도의 출현을 두려운 눈으로 지켜보고있는 상황에 이 위협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것이 비오 2세 앞에 놓인 문제점들 이었던 것이다. 모든 사정이 달라진 15세기에. 

 

비오 2세는 교황에 즉위한 후 2개월이 지나자 추기경회의에서 기독교 세계에 닥친 현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십자군을 일으키기로 결심한다.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감으로써 군주들을 이 성전에 참가시킴으로서 그들을 교황 밑에 통합하고, 과거의 십자군 시대처럼 그들에 대한 교회의 권위를 되살리려한 것이다. 하지만 두 명의 추기경을 제외한 14명의 추기경은 침묵을 지켰다. 그런 와중에 기독교 세계의 모든 군주들에게 만토바 회의의 소집을 알리는 교황의 칙서가 발송되었다. 

 

예정된 회의 개최일에 만토바에 참석한 군주는 개최지인 만토바의 루도비코 곤차가 후작뿐이었다. 그는 넉달만에 개최된 회의에서 유럽의 모든 기독교도에게 십자군에 참가하여 터키와 싸우는 것이먀말로 신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3년 동안 터키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준비한다는 만토바 회의의 결정을 담은 교황 교서가 모든 기독교도에게 공표되었다. 8개월 이상 전쟁에 참가한 사람에게는 모든 죄를 속죄받을 권리가 주어진다라는 내용과 함께. 로마로 돌아온 교황은 십자군을 실현시키기 위해 로마 교황청을 통일하면서 기반을 확립했지만, 로마 이외의 지역은 간단히 교황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십자군에 참여하겠다는 군주는 아무도 없었고, 자금도 모이지 않았다. 

 

절망의 밑바닥에 있던 교황은 마지막 수단으로, 적인 술탄 메메드에게 편지를 보낸다. 세례를 받고 기독교 의식을 행하고 성서를 믿는다면, 그리스와 오리엔트의 황제로 임명하고 불법으로 차지한 지역에  대한 권리와 영토를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23세의 젊은 나이에 지중해 동부 최대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비잔틴제국을 붕괴시킨 대담무쌍한 이제 갓 서른 살이 된 메메드2세는, 로마의 비오 2세에게 끝내 한 통의 답장도 보내오지 않았다. 

 

많은 회유와 협박에도 십자군에 참여할 생각을 보이지 않았던 서유럽도 1463년 레스보스 섬이 터키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엉덩이가 무거운 베네치아를 움직이게하는 듯 보였다. 베네치아라는 강대국을 우군으로 끌어들인데다 추기경 회의에서도 승인을 받은 비오 2세는 십자군 원정을 당장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실질적인 토의를 위해 로마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여러가지 상황들이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안코나에서 베네치아에서 올 함대를 기다리겠다고 교황은 로마를 떠난다. 터키 술탄이 보낸 특사가 베네치아와 강화회담을 갖기 위해 아드리아 해를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로마를 떠난지 한 달 뒤인 7월 19일에 안코나에 도착했는데, 여기서 교황 일행을 맞이한 것은, 십자군에 참가하려고 유럽 각지에서 모여든 일반 군중의 열광적인 환호와 , 무슨 재난이 덮치기라도 한 것처럼 말없이 지켜보는 안코나  시민들의 차가운 눈초리였다. 하지만 자국의 상업적 이익만 생각하고 행동한 베네치아는 터키와의 강화 교섭이 시작되려는 지금, 단 하나의 기독교 국가도 참가하려하지 않는 십자군에 가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오리엔트의 정세를 모른 채 종교적 열정에만 불타는교황과 손잡고 터키와 싸우는 것은 베네치아의 손발을 묶어서 자유로운 행동을 방해할 뿐이라고 그들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선박은 커녕 병사 한 명 보내오지 않았다. 비오 2세의 기대에 부응한 것은 이름도 없고, 무기도, 인솔자도 없는 거지떼들만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이 모든것이 비오 2세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어 그 사이 계속 좋지않았던 병세가 갑자기 나빠졌다. 겨우 베네치아 함대가 부두에 도착해서 상륙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베네치아 함대가 입항했다는 소식은 병상의 비오 2세에게도 전해졌다. 하지만 비오 2세는 열이 높았다. 십자군 출정일 전날 비오 2세는 열린 창가로 환영을 본다. 약속한 모든 십자군이 물밀듯 들어온다는 소리와 환영을 보면서, 몸을 겨누지 못하고, 곧 쓰러진다. 로마를 떠난 지 두달 뒤까지 오지않는 십자군을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기다리다 그는 결국 로마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타지 안코나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동행했던 추기경들은 비오 2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뿔뿔이 흩어져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에 참석하기위해 로마로 돌아가는 모습을 로드리고 보르자가 바로보면서 이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비오 2세의 유해도 이틀 뒤에 로마로 옮기기로 결정되면서 비오 2세의 삶은 마감된다. 최후의 십자군에 대한 환상은 그가 생을 마감함으로써 끝나고 만다. 성전을 믿은 마지막 교황의 죽음과 함께.

 

2. 알렉산데르 6세 (1492-1503) 와 사보나롤라

 

무       대 : 로마와 피렌체

등장 인물 : 알렉산데르 6세, 사보나롤라, 피렌체의 상인 루카 란두치, 교황 비서관 바르톨로메오 플로리도

시       대 : 1495년 ~1498년 4년 동안

 

현재까지 남아있는 알렉산데르 6세와 피렌체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사이에 오간 편지와, 14살부터 80살까지 일기를 남겼던 지극히 평범한 피렌체 상인인 루카 란두치의 일기와 교황의 비서관인 바르톨로메오 플로리도의 일지를 통해서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악명 높았다고 우리에게 알려졌지만 꼭 그런것같지만은 않은 알렉산데르 6세와 화형 당한 수도사 사보나롤라을 관찰할 수 있는 이야기. 

 

( 루카 란두치의 일기는 절반은 창작이고, 교황 비서관 플로리도 이야기는 실존 인물이었지만 기록을 남기지않아 그 시대의 연대기와 교황청에 보내진 보고서와 각국 대사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를 바탕으로 완전 창작된 이야기이다.) 

 

정교분리 원칙을 주장하는 알렉산데르 6세교황과 신권정치를 주장하는 피렌체의 사보나롤라는 결국에는 어느 한쪽이 사라지지 않으면 안될 운명에 놓인다. 결국 노련한 보르자 교황의 서두르지않는 힘과 피렌체의 민중의 마음의 변화에 의해, 초조할 나이에 접어들어 사태 파악을 잘하지못했던, 사보나롤라는 화형장으로 향하게 된다.

 

알렉산데르 6세 : 에스파냐 출신이고 큰아버지인 교황 칼릭스투스 3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었고, 1492년 61세의 나이로 신의 대리인인 교황에 선출된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원하는 세상 : 모든 종교의 공존과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고, 정교 분리원칙을 주장한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 도미니크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했고, 1491년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장으로 승진했다.

사보나롤라가 원하는 세상 : 프랑스 왕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을 기회로 삼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을 추방하고, 그 곳에 인민 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한 후, 그는 피렌체에 신권정치를 확립하기를 원한다. 

 

로드리고 보르자 추기경은 능력, 권력, 재력이 추기경들중에서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확실한 기회가 올 때까지는 무모하게 교황 자리를 노리지 않고 34년 동안이나 끈기있게 기다린 사람이다. 

 

교황은 광신적이 아니라는 점은 베드로와 비슷하지만, 성 베드로처럼 선량한 인간은 아니다. 문제점이 많아 보이는 사보나롤라에 대해 알렉산데르 6세가 결정적인 행동을 취하려 하지 않는 것은 사보나롤라를 순교자로 만들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민중의 지지를 얻고 있으면서도, 권력에 희생된 자로 기억되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사보나롤라에 대한 피렌체 민중의 신앙이 강고해지면 그것은 피렌체 공화국을 프랑스 왕한테서 분리하여 이탈리아 나라들과 공동보조를 취하게 하려는 교황의 의도를 실현하는 데 결코 효과적인 방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렉산데르 6세는 정교분리를 생각한 최초의 교황이었다. 그는 모든 종교의 공존과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유일한 교황이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불행은 많은 군주국과 공화국으로 분열되어 있는데 있음을 그는 파악했다.  이런 상태의 이탈리아는 강력한 군주 밑에 통일 되어가는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먹이가 될 뿐이었다. 그것을 피하려면 교황령을 포함한 이탈리아 전역을 통일된 세속국가로 만들어, 각국에 대항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교황청은 지금과 같은 어정쩡한 형태가 아니라 기독교 세계 전체에서 진정한 의미의 교회 역할만 맡게 된다. 

 

물론 알렉산데르 6세는 자신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의 영달을 꾀했고, 그 자신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를 실현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교황은 온 힘을 다하여 그 사람을 지원할 게 분명해보였다. 

 

교황청과 이탈리아는 지나치게 밀착해 있다. 그것이 양쪽 모두에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이 된 것이다. 그는 어쩌면 에스파냐 태생의 외국인이었기에 이탈리아 출신의 교황보다 그 점을 날카롭게 꿰뚤어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의도하고 있는 개혁은 피렌체 한 나라만의 개혁을 생각한  사보나롤라에 비해 규모가 훨씬 크고, 그 방향도 정반대다. 우선 교황청 국가를 완전히 세속화하고, 그 힘을 이용하여 이탈리아를 통일된 세속 국가로 만든다. 그러면 로마교회는 세속 영토를 잃게 되고, 따라서 세속 권력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면 진정한 국가는 국가의 역할을, 교회는 교회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알렉산데르 6세의 생각인 것이다.

 
 그 반면에, 아무리 선량하고 청렴한 인간이라도 반드시 좋은 지도자가 된다고는 할 수 없다는 현실을 모르는 피렌체에, 사보나롤라의 등장은 페스트가 퍼질 조짐이 보이는 15세기 말 즈음이었다. 
 
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큰 아들인 피에로 때의 사회적 모순이, 수도사 사보나롤라의 출현과 프랑스 왕의 침입을 계기로 폭발하여, 피에로는 추방당하고, 피렌체에는 사보나롤라의 신권 정치를 이념으로 하는 인민 정부가 수립되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헛수고가 될까봐 초조해진 나머지 그만 외곬이 되버린 사보나롤라 치하의 피렌체. 
 
그의 나이는 초조감이 가장 강하게 일어날 수있는 45세였다. 또한 사보나롤라의 이상은 피렌체에 그리스도를 왕으로 하는 신권 정치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사보나롤라는 그의 설교나 저술에서, 기독교도의 신앙은 이교도를 배척하고 멸망시키는 데에서 나타난다고 말했다. 종교와 정치를 일치시키려는게 그의 의도였다. 
 
그의 생각은 철학도 문학도 예술도 모두 쓸데없는 것이고, 성직자만이 정치를 하기를 원했다. 사보나롤라의 실수는 권력 따위는 바라지 않았지만, 그를 민중이 권좌로 밀어올렸고, 자신은 거기에 편승해버린 것이고, 자기가 서있는 발판이 허약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강한 자신감으로 눈이 흐려져서 무모하게 돌진해버렸고, 그것이  자신의 실수인지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는 성실하지만 미숙했던 자의 생애였던 것이다. 

 

사보나롤라는 성직자와 정치를 결부시키려 한 반면에 ,알렉산데르 6세는 성직자와 정치를 갈라놓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시대 르네상스를 살면서 다른 것을 추구하는 두 사람이 부딪치면서 결국 신의 대리인 알렉산데르 6세에 의해 사보나롤라는 화형장으로 향한다.  

 

 

3. 칼과 십자가

 

율리우스 2세 (1503-1513)

 

 1) 리우스 2세의 페루자와 볼로냐 공략 : 두 도시에 모두 무혈입성 성공


제노바 근처의 가난한 양털깍기 직공의 아들로 태어난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는 수도사 삼촌이라고 부른 프란체스코 델라 로베레와 같은 길을 택하여 수도원으로 들어간다. 

 

이 수도사 삼촌이 식스투스 4세로 교황에 즉위했을 때부터 직공의 아들 줄리아노도 팔자가 트였다. 하지만 그 뒤로 리드리고 보르자가 교황에 오르면서 11년 동안 숙적 보르자 타도에 모든 것을 바친다.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는 프랑스 왕 샤를 8세를 끌어들였고, 사보나롤라를 이용하여 반보르자 운동을 일으켰다. 보르자 타도 계획이 모조리 실패로 끝났다고 생각할 때, 보르자 교황이 말라리아로 쓰러졌다. 그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프랑스 아비뇽에서 10년 동안의 망명생활을 접고 기회를 놓치지않고, 베네치아의 후원과 체사레 보르자를 구슬려 장악하게 된, 에스파냐 출신 추기경들 덕에 줄리아노는 교황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교황 즉위 전에 도움을 받았던, 체사레 보르자와 베네치아에 대한 교황령으로 부터 그들을 제거해야하는 일은 율리우스 2세가 교황에 오르자마자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즉위 전  체사레에게 한 약속을 지킬 의향이 전혀없었던 교황은 체사레를 로마 교회의 독립과 영광을 위해 쓰러뜨려야 한다고 여기고, 그를 체포하여 에스파냐 왕에게 넘긴다. 

 

그 다음은 베네치아였다. 강대국인 베네치아를 단번에 제거할 수는 없었고, 즉위 3년째를 맞이한 교황은, 우선 사적인 이기심이 강했던 보르자 교황과는 달리, 자신은 전적으로 로마교회를 위하고, 게다가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교황임을 베네치아에 과시하고 싶다는 측면에서 안성맞춤인 페루자와 볼로냐를 공략하기를 원했고 실행에 옮긴 것이다. 

 

로마교회의 영토수복이라는 깃발 아래 단행된 페루자와 볼로냐 공략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아닌밤중에 홍두깨였지만, 율리우스 2세로서는 즉위한 뒤 3년동안 충분히 생각한 끝에 취한 행동이었다.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기독교 세계의 수장 자리에 있는 63세의 교황, 미사를 집전하고 신도들에게 축복을 베푸는 평화의 사도여야 할 교황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터키군도 아니고 같은 기독교도를 공격하러 간다는 것은 실로 전대미문의 사건인지라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로마 민중이 아연실색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페루자에 무혈 입성하게 된 교황은 이에 힘을 입어 기독교 세계 전체에 대해 교황의 방침이라는 것을 발표한다. 

 

첫째는 교회의 지도 아래 이탈리아의 질서를 확립한다. 

 

둘째는 성스러운 로마교회의 권위와 영광과 질서가 모든 기독교 세계에 골고루 미치게 한다. 

 

셋째는 십자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을 해방시켜, 지금 이슬람교 사원으로 되어 있는 산타 소피아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겠다라는 내용이었다. 

 

볼로냐 역시 교황에게 성문을 열라는 사절에 대해, 볼로냐 참주 벤티볼리오는 이를 무시한다. 이 사실에 격분한 율리우스 2세는 당장 출정하기로 결심한다. 

 

교황의 파문에도 기죽지 않았던 볼로냐 참주 벤티볼리오는, 샤를 당부아즈가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모데나에 들어왔다는 정보에 밀라노로 처자식을 이끌고 망명을 떠난 바람에 볼로냐 역시 무혈 입성하게 된다. 

 

두 성을 공략한 율리우스 2세 교황은, 고리대금업자인 푸거가 바친 개선문에 로마의 고대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오리엔트를 정벌한 뒤 로마의 원로원에 보낸 승전보와 같은 유명한 말, VENI, VIDI,VICI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가 새겨진 개선문을 선물로 받고, 로마로 개선장군처럼 돌아왔다.

 

2) 율리우스 2세의 캉브레 동맹에의 합류로 힘이 더해진 서유럽 대동단결에 패한 베네치아 

 

정세 판단에 뛰어난 현실주의자가 곧잘 실수를 저지르는 이유는, 상대도 역시 정세 판단에 뛰어날테니까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의 입장이 그랬다.

 

오만하기까지한 베네치아가 시기심 많은 전유럽 국가의 대베네치아전인 캉브레 동맹으로 인해 많은 댓가를 치른다. 전유럽은 터키를 막아주는 베네치아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기 보다는, 베네치아에 대한 질투 어린 시선이 모여 유럽국가를 캉브레 동맹으로 단결케했고, 늦게까지 결정을 짓지 못하던 교황 율리우스 2세마져 이 동맹에 가담함으로써 대베네치아전이 촉발된다. 

 

프랑스 왕이 고용한 이탈리아인 트리불치오에 패한 아냐넬로 회전에서 패한 베네치아 육군은, 그동안 큰 싸움에서 한번도 져본 적이 없어서 이번 회전으로 인해 사기가 완전 저하되었다. 아냐넬로 회전에서 승리한 연합군의 로마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베네치아 사절단 6명에게 수치스러울 정도의 요구를 했고, 결국 베네치아 정부는 바로 자력으로 파도바를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율리우스 2세도 이탈리아의 독립이 보장되어야만 로마교회의 독립도 보장된다는 현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또한 터키를 막으려면 베네치아의 해군력이 필요하므로 베네치아를 궁지로 몰아넣을 수 없음을 알고있었다. 

 

그 이후 자신을 사자(베네치아) 조련사라고 호언하는 율리우스 2세는, 측근들을 거느리고 브라만테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 건축 현장이나,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그리는 곳이나, 라파엘로의 교황궁 벽화 제작하는 곳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 건축물이나 예술품은 거룩한 로마교회의 영광과 그것을 확립하기 위해 온힘을 바치고 있는 자신의 기념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율리우스 2세의 적은 베네치아에서 프랑스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는 : 이탈리아의 독립만이 로마 교황청의 독립임을 깨달아서였다

 

로마 교회군, 베네치아 군대, 신의 대리인인 교마교황, 그리고 기독교 세속인으로서 최고 지위인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힘을 합쳐 세상을 다스려야한다는 중세적 생각을 가진 스위스 용병을 합해 결성된 신성동맹의 적이 된, 프랑스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기 위한 첫 시도는 프랑스의 외성인 페라라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페라라 공격에 앞서 얼마 떨어져있지않은 미란돌라를 교회 연합군은 공격한다.

 

이탈리아인들 중에는 교황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사람이 비교적 많지만, 프랑스인은 신앙심이 강하기 때문인지 결정적인 순간에는 철저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미란돌라 해자에서 일각여삼추로 지원군 프랑스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신앙심이 깊은 프랑스사령관  당부아즈는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교회군이 미란돌라를 함락시켜주기만을 기다리며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었다. 

 

결국 프랑스 원군 도착 최종일에 미란돌라는 항복을 하고 만다. 승리의 기쁨을 억누르지 못한 율리우스 2세는  교황의 반지를 미란돌라에 남겨놓은 후 마음은 이미 다음 공략지인 페라라로 날아가고 있었다. 

 

추가경들의 페라라 공략에 대한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포기하지않았다. 그런 페라라로 프랑스의 강력한 지원하에 아냐넬로 회전의 사실상 승자인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 장군과 알폰소 데스테와 벤티볼리오가 볼로냐에 입성했다. 그 사이 교황 대리로 볼로냐를 통치하던 전임자들의 악정에 지친 볼로냐는 쉽게 급진화되어 있던 상태였다 

 

율리우스 2세의 과오는 민심을 통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과감한 조치를 취하는 것을 소홀히 한 데 있었다. 통찰력과 결단력은 윗사람에는 첫째가는 조건이다. 적이나 무능력자를 과감하게 조치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자기 편이나 아까운 재능을 가진 사람을 자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필요성을 알면서도 좀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율리우스 2세에게는 그것이 부족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런 재능은 일종의 천부적 소질이고, 나이가 들어 경험이 풍부해졌다고 해서 누구나 갖추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다지 유능하지도 않았던 아리도지 추기경이 누구보다도 자기한테 충성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엄격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율리우스 2세는 라벤나에서 가장 사랑하는 조카와 가장 신임하고 있던 부하를 동시에 잃어버린 절망을 맛본 후 로마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교황은 로마로 돌아오는 중 독일과 프랑스의 양대강국이 자신을 파멸시키려는 공의회가 피사에서 개최될 거라는 소식을 듣게된다.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어 심신이 모두 녹초가 되었지만, 율리우스 2세는 5만 두카토나 나가는 황금 삼중관을 쓰고 산 피에트로 대성당까지 퍼레이드를 강행했고, '고생스럽고 보람없는 우리의 행군은 이렇게 끝났다'라는 교황 의전관의 기록만이 그 때를 기록하고 있다.

 

4) 율리우스 2세의 위기에서 구해주는 것은 자기 편이 아니라 항상 그의 적이었고, 그의 가장 좋은 점은 막판에 몰렸을 때 발휘되는 불굴의 정신이다. 

 

피사에서 열기로 한 공의회는 기독교 세계의 평화 회복, 교회 개혁, 터키에 대하 십자군 원정 계획을 토의한다는 대의명분만은 제법 당당했지만, 곧 후원국들의 보조가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프랑스인 특유의 기독교도적인 망설임 때문에 교황을 더 이상 궁지에 몰아넣을 마음이 나지 않았던 루이 12세는 금방이라도 로마로 쳐들어갈 기세로 볼로냐에 버티고 있는 트리불치오를 밀라노로 소환한 뒤, 벤티볼리오의 복귀를 인정하고 프랑스파 추기경들과 화해한다는 조건으로 교황에게 회담을 제의했다. 피사 공의회의 성명서에 이름이 오른 9명의 추기경도 또한 분열했다. 율리우스 2세는 바로 반격에 나섰다. 로마에서 공의회를 개최한다는내용이었다. 피사 공의회의 내용에다가 이단 및 분파 활동에 대한 대책을 토의한다는 항목이 추가되었다. 

 

강대국 프랑스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한 율리우스 2세는 신흥국가 에스파냐에로 눈을 돌렸다. 프랑스를 내쫒아내고 이탈리아 영토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던 에스파냐는 교황의 제의에 바로 동맹을 맺어왔다. 

 

교황은 프랑스라는 독을 없애기 위해 에스파냐라는 또 다른 독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군사 원조를 약속한 대신 나폴리를 중심으로 한 남부 이탈리아에 대해 에스파냐의 영유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 영유권은 에스파냐 출신인 보르자 교황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성동맹이 맺어졌다. 

 

로마교황청, 에스파냐왕국, 베네치아공화국, 영국, 스위스 등이었고, 독일 황제는 약간 유보적인 모양을 띄우고 있었지만, 이 즈음 막시밀리안은 속계의 최고 지배자인 본인이 성지계의 최고 자리인 교황이 되고 싶은 욕망이 생긴 것이다. 물론 그 자리보다는 교황청으로 흘러들어온 막대한 돈이었다. 물론 돈놀이꾼인 야코프 푸거의 정확한 판단으로 막시밀리안에게 돈을 빌려주지않음으로써 독일 황제의 백일몽은 눈치채이지 않은채로 어둠 속에 묻혔다. 

 

피사 공의회를 방해하는 교황의 시선은 피사 공의회파를 토끼를 쫒는 여우처럼 집요하고 뒤쫓았고, 피사에서의 무력 충돌로 밀라노로 자리를 옮겼지만, 그곳 역시 교황의 성무금지령을 내렸기때문에 민중의 협력을 구할 수 없었고, 결국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 리옹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지만 그 결말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로마에서 교황은 이런 경과를 보면서 로마에서의 공의회 준비에 착수한다. 이탈리아을 위해 유효한지 어떤지는 제쳐두고라도, 에스파냐와 베네치아, 영국, 스위스를 포함하는 신성동맹을 성립시켜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독일 황제도 동맹에 참가하겠다는 결단은 내리지 않고 있었지만 교황에게 반대하는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율리우스 2세는 자신의 불굴의 정신이 거둔 성과를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5) 율리우스 2세와 프랑스 사령관 가스통 드 푸아

 

프랑스 루이 12세의 조카이자 에스파냐 왕 페르난도의 처남인 22세의 느무르 공작인 가스통 드 푸아는, 68세의 율리우스 2세의 간담을 서늘하게했다. 프랑스 왕 루이 12세는 신성동맹군과 대결시키기 위해 그를 이탈리아로 보내서 두 달 동안 자코모 트리불치오 장군 밑에서 철저한 지휘관 교육을 시킨다. 

 

전 유럽세력이 대동단결해서 프랑스 세력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려는 신성동맹에 투입된 가스통 드 푸아는 라벤나를 결정장을 선택한다. 그리하여 16세기 전반의 가장 처참한 싸움이 된 라벤나 회전이 시작된 것이다. 1500년 전에 라벤나를 손에 넣어 로마로 가는 길을 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역시 그 지역의 중요성을 실증해주었듯, 23세의 가스통 드 푸아, 그의 선택은 정확했다. 

 

8시간에 걸친 격전이 끝난 후 14,000 여구의 시체와 함께 프랑스 쪽의 승리로 끝났지만, 총사령관 가스통 드 푸아가 전사함으로써 프랑스쪽은 승리군이라기보다는 장례식장 같은 분위기였다. 

 

신성동맹군의 패배 소식을 들은 율리우스 2세는 프랑스 군이 로마로 바로 밀고 들어올 것 같은 공포에 시달렸지만, 레오 10세가 될 조반니 데 메디치가 사촌 줄리오 데 메디치를 통해 율리우스 2세에게 가스통 드 푸아가 전사했다는 소식과 함께 프랑스군이 우왕좌왕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게 한다. 아무리 프랑스군이 오합지졸이라해도 이탈리아는 그 때 완전히 프랑스의 손아귀에 들어가있었다. 하지만 라벤나 전투 승리 이후 루이 12세는 그 우유부단함과 정치에 대한 일관성 없음으로 인해 다음 명령을 내리는 결단력이 부족함에 따라 결단을 내리지못하고, 그 뒤로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결단력과 용기의 사나이인 율리우스 2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않고 행동에 옮겨, 드디어 루이 12세의 프랑스군의 본국 귀환이란 명령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세력을 완전히 일소한다.

물론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서 외세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6) 율리우스 2세와 신성로마제국

 

프랑스를 로마에서 몰아내고, 로마 교황청의 땅은 확대되었고, 프랑스 왕 , 에스파냐 왕, 영국 왕, 베네치아를 선두로 이탈리아 국가들, 신성로마제국 황제까지도 율리우스 2세에게 고개를 숙여 교황의 승리가 완성된 처럼 보였지만,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불러들인 에스파냐가 나날이 세력을 쌓고 있음을 율리우스 2세는  감지한다. 

 

현재는 에스파냐에 대항할 수 있는 나라는 이제 독일만 남았고, 또다시 독을 제거하기위해 독을 불러들인다. 독일 황제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랑을 단번에 추기경으로 임명해주었지만, 가는 밀라노 공작에 붙는 것을 보고 황제의 속셈이 밀라노공국을 통해 북부 이탈리아에 세력을 확장하는 데 있다는 것을 분명히 파악하게된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이 얼마남지않아서 초조한 교황에 비해 독일은 서두르지않았다. 이제 12살 된 카를로스가 서서히 커가고 있기때문이었다. 독일 황제 막시밀리안의 손자이자 에스파냐 왕의 외손인 그가 자라고 있기때문에 독일의 관심은 프랑스 세력이 이탈리아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이탈리아 북부를 단단히 지키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에스파냐를 제거하기위해 독일을 불러드린 로마는,그 후 1527년에 로마 약탈이라는 초유의 대사건과 맞닥트리게 된다.

 

 

4. 16세기 초엽의 로마 풍경

 

레오10세 (1513-1521) : 피렌체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이 셋이었다. 첫째는 미쳤고, 둘째는 현명하고, 셋째는 착하다고들했는데 그 중 현명하다고 알려진 둘째 아들 조반니 데 메디치가 레오 10세로 교황의 자리에 오른다.

 

태풍의 연속같은 율리우스 2세의 치하가 끝나고 콘클라베를 지배하는 것은 평화를 갈망하는 분위기에 따라 37세의 젊은이 조반니 데 메디치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자신이 평화를 사랑해서 교황에 선출되었다고 생각한 레오 10세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누리게 해주고 싶어했다. 

 

본인 자신이 즐기면서 다른 사람도 즐겁게 해주고 싶은 초기 마음이 변치 않다보니 레오 10세가 46세 생일을 앞두고 급성 폐렴으로 사망할 때 까지, 재위하는 기간 동안 450만 두카토(약 2천억원)을 소비했고, 70만 두카토(약 300억 원)에 이르는 빚까지 남기고 죽었다. 

 

갑자기 죽어서 참회도 못했기에, 카톨릭 교리에 따르면 연옥행을 면치 못할 운명이었지만 메디치 가문의 일 마니 피코의 아들답게 확실하게 돈은 잘 썼고 그당시 로마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많이 제공해주었다. 

 

레오 10세의 생각은 로마는 극장과 같아서 누구나 로마에서는 배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희극이 될 지 비극이 될 지 모르지만 자신의 치세동안은 즐기기를 원했고, 되도록 웃으면서 자신의 삶을 끝내고 싶어했다. 

 

정치와 외교에서는 놀랍게도 비동맹 정책에서 정반대 방향으로 돌아서서 동맹 정책을 취했다. 게다가 모든 열강과 우호 동맹을 맺었다. 레오 10세는 프랑스 왕, 에스파냐 왕, 독일 황제, 영국 왕, 그리고 베네치아까지 1대 1로 우호 동맹을 맺는 정책으로 바꾸었고, 이런 교황의 수법을 베네치아 이외에는 아무도 교황의 수법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고, 강대국 왕들은 자기만 교황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때론 교황 레오 10세는 비상한 수완가인지, 아니면 그 자신이 자주 말하듯 게으름뱅이에다 겁쟁이이고 전대미문의 식충인가하고 의심하는 베네치아의 대사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완전히 파악되지 못한 교황이기도 했다. 

 

레오 10세는 역시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을 꾸민 집단에 대해서도 직접 관련된 추기경들까지도 용서했다. 교황의 치세가 시작된 이래 로마 인구도 30퍼센트가 늘어났다. 피렌체에서는 세련된 취미를 배우고, 로마에서는 돈쓰는 법을 배웠다는 레오 10세는 아버지 일 마니피코는 메디치 은행을 파산시킨 것에 끝났지만 그는 교황청을 파산시킬 정도로 많은 돈을 뿌린 교황이었다. 그가 지나가는 곳에는 언제나 은화가 뿌려졌던 것이다. 

 

레오 10세의 치세동안 북유럽의 루터가 로마 카톨릭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점점 거세어졌다. 

 

루터파의 프로테스탄트는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와 맺어지기 위해 진지하게 열심히 노력하는 강한 의지력을 갖추고 있다고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자가 직접 연결되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강한 인간의 의지력과 보이지 않는 교회만이 인간을 구제할 수 있는 단안적 시각을 제시한다. 

면, 로마 카톨릭은 인간성에는 선과 악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며 인간이 가진 약함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그리스도와 맺어지기 위해 진지하게 열심히 노력하는 의지력을 잃어버리기 쉬운 사람을 위해서 중개자 역할을 하는, 눈에 보이는 교회, 즉 지상의 교회가 있는 편이 좋다는 입장임을 레오 10세는 강조한다. 

 

성인이나 성상도 숭배하는 것도 단호히 배척하는 루터파의 주장에 대해 머지않아 순교냐 승리냐의 선택을 강요당하는 세상이 될거라고 레오 10세는 예언하기도했다. 

 

현실적인 성격의 메디치가 출신 레오 10세는 너무 심각하지도 않고, 사냥도 즐기고, 이교적이고 야단법석인 사육제 참석도 원하는 유쾌한 교황 레오 10세였다.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즐겁다는 레오 10세는 죽은 기념비를 후세에 남기는 일에 무관심했으므로, 유해는 적당히 매장되었다. 

 

 

4. 내 영혼을 깨우는 구절들

 

● 콘클라베는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추기경단의 비밀회의이다.

 

● 선량한 사람들이 지은 죄를 낱낱이 파헤쳐 그들을 지옥의 공포로 몰아넣는 것은 기독교회가 가장 장기로 삼는 방식이다.

 

● 수도사들이 만든 이 형법에는 간통, 신성모독과 살인 같은 죄는 40일 내지 7년의 고행으로 속죄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엄격한 금욕생활 속에서 신경질적으로 만들어진 이 교회법에는 모든 것이 죄가 되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도 지은 죄를 모조리 열거하면 적어도 300년 정도의 고행은 각오해야 한다.

 

● 교회는 돈으로 속죄를 대신하는 것을 인정했다. 고행에 해당하는 돈을 교회에 갖다 바치면 속죄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현금 대신 부동산을 바칠 수도 있었다. 결국 교회는 신자들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부와 권력의 영원불멸한 원천을 확보한 셈이다. 돈으로 지불할 수 없는 사람은 몸으로 지불해야 한다하여 채찍으로 얻어맞는 고행이 정당화된다. 유명한 성 도미니쿠스는 엿새 동안 무려 30만 번이나 채찍질을 당하고 100년치의 속죄를 몸으로 때울 수 있었다. 11세기가 되자, 우르바누스 2세의 전임 교황들은 이교도에 대한 성전에 참가하면 속죄한 것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 돈이나 땅으로 죄값을 치르려 해도 충분한 재산이 없고, 매를 맞자니 너무 고통스럽고,그래서 천국에 가기는 글렀다고 체념했던 선량한 사람들이 신이 원한다하고 속죄를 해준다고하니 그들의 마음은 이교도와 대결할 용기로 가득했고 십자군에 참여하게 된것이다. 이런 목적이 없었다면 전략적으로나 상업적으로도 아무 가치가 없는 팔레스타인 지방을 되찾는 일에 그들이 그토록 집착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자신감을 잃지도 않고, 십자군 원정에 의문을 품지도 않고 무려 2세기 동안 200만이 넘는 유럽인의 십자군 참여을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 인간은 배부른 상태보다 배고플 때 더 광신적이 되기 쉽다. 

 

● 자신의 주의주장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이른바 이상주의자라고 불리는 인간은 위험하다. 세계의 멸망은커녕 한 민족의 멸망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사상 따위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 같으면 만약 내 사상을 관철하기 위해 세계가 멸망한다면 그런 사상은 당장 집어 치울 것이다- 알렉산데르 6세가 피렌체의 광신자 사보나롤라가 전세계가 멸망한다 해도 자기는 굴복하지 않겠다고 한다는 말을 듣고. 

 

● 죽음은 자초해서는 안되고, 죽음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 민중은 불가사의한 존재다. 한 사람씩 떼어놓고 보면 선량한 동시에 교활한 만큼 영악하고, 제 신변이 위험해질 것 같다고 느끼면 당장 겁쟁이가 된다.

 

● 1492년 에스파냐인들이 이교도를 그라나다에서 쫒아냈을 때, 이슬람교도는 아프리카로 달아났지만 유대교도는 갈 곳이 없어졌다. 그때 그들을 받아준 것이 교황에 갓 즉위한 알렉산데르 6세였다. 교황은 로마 시내에 있는 한 구역을 유대인의 거주지(게토)로 설정하고, 거기에 살게 했다. 또한 교황은 뛰어난 명의라는 평판을 얻고 있던 한 유대인을 주저없이 자신의 주치의로 삼았다.

 

● 우쭐해지면 현실을 보지 못하게 되고, 자기 행위를 변명하기 시작한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 잘못은 가장 중요한 상황에서 인간의 감정을 잘못 통찰하고 오판을 내린 사람 쪽에 있다.

 

●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이 갖는 위험과 과오는 여기에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은 좁은 의미에서의 이기심은 갖고 있지 않고,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숭고한 소명을 위해 한몸을 바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망설임이나 의심을 품지 않고, 따라서 독선적이고 광신적이 되기 쉽다. 그래서 현실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방식은 대담하지만, 하는 일에 도무지 일관성이 없다. 당연히 결과는 실패로 끝난다.

 

● 반면에 이기적인 야망에서 출발한 경우에는 그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항상 효과적인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한창 행동하고 있을 때에도 늘 의심을 품게 되고, 독선적이거나 광신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현실을 보지 못하는 일은 없다. 방식은 역시 대담무쌍하지만, 행동 하나하나가 유효성을 우선한다는 점에서 일관된 정책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 경우,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운이다.

 

● 천국으로 가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지옥으로 가는 길을 잘 아는 것이다- 마키아 벨리

 

● 정치와 종교는 생각해보면 기묘한 사이이다. 종교가 자신이 좋은 점을 본래의 모습으로 발휘하도록 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정치가 기능을 잘 발휘하는 것이다.

 

● 페리클레스와 로마의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같은 진정한 정치가는, 백성을 천국으로  보내기 위해서라면 자신은지옥으로 떨어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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