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장 요약 : 레판토 해전은 2천 년을 이어온 지중해 세계가 그 역사적 역할을 매듭짓는 시기에 관한 애절한 송가
1. 제목 및 저자 소개
레판토 해전 - 시오노 나나미
시오노 나나미는 올해로 84세가 된 일본 출신의 작가, 소설가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로마사에 천착했다. 1990년대 이전에는 르네상스 시대에 관한 책들을 주로 썼고, 그 이후로 2006년까지는 로마인 이야기 전 15권을 통해 고대 로마의 역사를 집필했다. 칠월칠석에 태어나 그의 이름 나나미가 지었졌다. 이탈리아인 의사와 결혼해 피렌체에 정착하고 아들을 하나 두었으나 이혼했다. 아들과 로마로 이주해 그곳에서 거주하면 여전히 집필 중이다.
2. 이 책을 읽게 된 동기
전쟁 3부작 책을 손에 들었던 계기는 시오노 나나미 작가 역시 나에게 전작주의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정규 과목의 세계사 공부에서 레판토 해전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었고, 그 지역이 어떤 의미가 있어서 책 한 권의 제목까지 선택하게 되었을까가 궁금해서 이 책 레판토 해전의 책 장을 넘기기 시작했던 것이 이 책을 읽게된 동기였다.
3. 글쓴이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줄거리)
무 대 : 1571년 10월 7일 맑은 가을날 레판토 지역 (그리스어 : 나우팍토스) 파트라스 만 입구
주인공 : 아고스티노 바르바리고, 플로라, 마칸토니오 바르바로, 피우스 5세, 셀림 2세, 펠리페 2세, 돈 후안 외 신성동맹에 참가한 16세기 서유럽의 장삼이사
대제라고 불렸던 투르크군 쉴레이만 1세의 아들로 태어난 셀림 2세는, 어떻게 하든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선대제의 생각을 지키는 온건파와는 달리 재상 피랄 파샤를 주축으로 강경파들의 생각은 코란의 가르침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야말로 이슬람의 본래 모습이라 믿고 있었고, 동지중해에서 기독교 세력을 일소하는 것을 투르크 제국의 체면 문제라고 여긴 세력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투르크군의 16세기의 상황이었다. 그들은 서유럽 기독교 세력에 대해 강경대처를 주장했다. 그 일환으로 베네치아의 지배하에 있는 키프로스를 공략했다. 1년 동안 버텨온 키프로스 저항세력을 모조리 죽임으로써 서유럽 세력의 대투르크에 대한 신성동맹을 맺게 하는 단초가 되었다.
이에 맞서는 서유럽 신성 동맹 세력은, 로마 교황이자 달걀만 먹고도 힘이 넘치고 십자군 정신으로 무장된 피우스 5세, 베네치아를 눈에 가시처럼 생각하는 에스파냐 펠리페 2세, 공화국의 마지막 빛을 발하는 70여 년 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조국 베네치아을 위해 온갖 수를 다쓰는 외교관과 충정 하나로 버티는 전투원들이 모인 베네치아였다.
기독교국의 불협화음 속에도 7월 투르크는 선박 300척에 10만 병사를 태우고 키프로스 남안에 상륙한다. 연합함대가 크레타를 출발하기 10일 전 9월 8일 3천 방위군이 거의 전멸한 상태로 니코시아가 함락된다. 방위군을 지휘하던 베네치아 귀족들은 전멸한다.
잔인한 방법으로 잔류 주민을 살해한 투르크 군에 대한 정보는 같은 라틴계 민족인데도 민족성이 극단적으로 다른 에스파냐와 베네치아를 결성케했다. 베네치아는 더 이상 혼자 힘으로 투르크 방위가 힘들어졌고, 에스파냐는 북아프리카의 영토에 대한 야심으로 베네치아의 해군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각자의 이기심을 기초로 대투르크전에 나서게 된 것이다.
교황은 이슬람교도와 싸우는 게 중요했다.
기독교도, 투르크군 양군을 합쳐서 500척의 갤리선과 17만명의 십자가와 초승달이 격돌하는 성전이 시작될 날이 밝았다.
1571년 10월 7일 낮 즈음, 파트라스만 입구 레판토에서는 투르크의 모든 선박을 불태우거나 침몰시켰으며 나머지는 모두 포획했다는 승리를 알리는 신호가 올라왔다.
이로써 무적 투르크 군의 불패 신화가 깨졌다. 서유럽 동맹군은 1453년 이후 118년 만에 처음으로 얻은 진짜 승리였다. 참모장 아고스티노 바르바리고는 자신이 바라던 죽음을 가장 행복한 순간에 맞이했다.
4만 명에 이르는 전사자와 부상자 수를 남기고 피를 흘린 대가로 1642년 까지 72년 동안 평화가 이어졌다. 베네치아는 레판토 해전 승리를 기념해서 10월 7일을 국경일로 정했다. 이렇게 해서 갤리선의 최대 최후의 해전이자 십자가를 앞세운 마지막 전투였고, 그때 이후 서유럽의 어떤 사람도 십자군을 제창하지 않았다. 레판토 해전 이후 베네치아도 투르크도 쇠퇴 일로에 접어들었다.
레판토 해전을 통해 시오노 나나미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오랜 지중해 시대를 어떻게 마무리되는가, 그 속에서 인간들은 어떻게 자기 앞에 놓인 어려운 문제를 맞서가는가 였다.
4. 내 영혼을 깨우는 구절들
●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 정치라면, 피를 흘리는 정치가 전쟁이다.
● 강국이란 전쟁과 평화를 마음대로 선택 할 수 있는 나라이다 : 프란체스코 소란초
● 피우스 5세의 십자군 정신을 부추기는 것만이 베네치아가 택한 길이었고, 교황은 베네치아 술책에 넘어갔다.
● 사람에게는 진실을 간파하는 눈이 있다. 그러나, 한 편 진실이길 바라는 것을 진실이라 믿고야 말 때도 있다.
● 갤리선은 적과 접근전을 전문으로 하고, 갈레아차는 적선에 포격을 가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 레판토 해전에서 오만한 강국이었던 에스파냐는 17년 뒤 1588년 무적함대(ARMADA)가 영국 해군에 패하면서, 대영 제국의 출범의 시초가 되었다. 전투 자체는 영국 해군의 힘보다 에스파냐의 불운에 의해서였지만, 지중해를 주름잡던 갤리선이 설자리를 잃었던 것이다.
● 레판토 해전은 기독교와 이슬람교도 간에 치러진 역사상의 한 사건이자, 지중해가 역사의 무대였던 기나긴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전투였고, 갤리선이 주역을 맡은 마지막 대해전이기도 했다.
● 레판토 해전에서 서유럽의 신성 동맹에 가담한 갤리선 전투원 중에는 젊은 날의 세르반테스도 있었다.
● 투르크와 외교 교섭은 유리공을 서로 던지면 주고받는 것 같다. 단, 상대가 아무리 세게 던져도 이쪽에서는 그럴 수 없으며, 그렇다고 공을 팽개칠 수도 없다 : 콘스탄티노플 주재 베네치아 대사
● 단 한 번이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사랑을 받은 여자는 다시는 외로워지지 않는 법이다.
● "무엇 때문에 싸우려 하시오"라는 돈 후안의 질문에 베네치아의 총사령관 베니에르는 "그래야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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