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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작가

이덕일의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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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돌파 능력, 비전제시 능력, 탁월한 국정수행 능력, 뛰어난 현안해결 능력, 능수능란한 외교력, 유연한 사고방식, 날카로운 인재발탁 능력을 갖춘 리더의 이야기

 

1. 제목 및 저자 소개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이덕일 

 

이덕일은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시작으로 흡입력 있는 문체로 한국사의 쟁점들을 명쾌히 풀어냄으로써 역사대중화를 이끌어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이다. 

 

조선사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바꾸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 국가인 고조선의 실체를 다각도로 파헤쳐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에 의해 왜곡된 고조선 역사를 완전 복원해냄으로써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 이 책을 읽게 된 동기

 

전작주의를 하고 싶은 저자의 글이어서 읽고 싶었고, 이 책을 읽기 시작한 2010년 1월에는 우리나라를 움직이는 리더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고, 나역시 사업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해야할까라는 많은 고민을 하면서 삶의 지표로 바라보며, 힘을 얻고, 나아가고 싶을 때 이덕일의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을 읽기 시작했다. 

 

또 한편으로는 사적인 마음도 작용했다. 

 

유씨 성을 가진 유성룡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알고 싶었고, 역사적인 자료로 믿을만하게 접근해 있고, 존경할 만한 분의 글로 쓰여진 내용으로 살피면서 낱낱이 알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였다.




 

 

 

3. 글쓴이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과  교훈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17만명의 육군과 수군이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이 이끄는  제1군을 선두로 조선 땅을 침략했다. 

 

16세기 말 조선에  임진왜란이 발발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살펴보면,  외부적으로는 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일본열도를 통일하고 전공을 올린 수많은 무사들이 할 일이 없어진 상태였다. 

 

이에 대한 불안을 느낀 풍신수길이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는 조선과의 교역을 전담하던 대마도주에게 조선에 전달하라는 비밀엄무를 내린다.


명을 치러 가는데 조선이 길을 비켜달라는 것과  조선국왕을 일본으로 입조시키라는 특수 임무가 그것이었다.


내부적으로 조선은, 국방 정책을 보면 조선 초기에는 정도전이  왕자까지 병역의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어서 시행되고 있었지만, 중종 때 군적 수포제를 실시함으로써 양반은 병역에서 면제된 상태였다. 

 

일본의 통치자는 열도를 통일하고 넘치는 에너지를 밖으로 분출하려고 할 때 조선의 국방 상황은 이렇듯 바람 앞에 등잔불이 놓인 듯 하였다. 


조선은 일본의 이런 요구에 세종 이후 왕래가 없었던 150년간의 세월을 깨고, 통신사를 파견함으로써 일본의 상황을 파악하려했지만,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각기 엇갈린 보고를 듣고 싶은 것만 들었기에 위험 상황이 없는 것으로 결론 내고 싶어했다.  

 

일본 사신을 접대한 조선의 사신이 반드시 일본이 조선을 쳐들어올 것이라고 보고 했음에도 오히려 그 선위사의 관직을 삭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당시 조선의 왕 선조는 물론 양반사대부들은 나라를 다스릴 역량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십칠만명에 달하는  일본 육군과 수군이 조선을 침범했고, 양반사대부들은 병역의 의무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도망갔고, 일반 상민들만 병역의무가 있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때 일본이 침략해도 걱정이 없다던 신립 장군은  소집된 8천명의 조선군으로 일본군을 탄금대에서 맞이하기로 되었다. 

 

일본군에 비해 우위일 것 같은 조선 기마부대를 이끌고  평야지대인 탄금대에서 결전을 벌여 초기에는 승리했으나 곧 패배의 소리가 선조의 귀에 들어가자 임금인 그는 나라를 버리고 스스로 만주까지 가서 명나라의 제후 대접을 받고자하는 마음이 있었다.


임진왜란 중에 가장 큰 장애요소 중 하나가 바로 임금 선조였다.


이런 상황에서 영의정 겸 도체찰사인 유성용이 임진왜란 중 총 지휘권을 가지고 임진왜란을 극복해 나서게 된 것이다.


선조가 도주를 거듭하는 동안 유성룡은 혁명에 가까운 개혁을 시행하지 않는 한 조선은 망할 것을 예측했고 양반도 군대를 가는 체제로 바꾸지 않으면 조선은 살아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면천법을 통과시켜 서자들과 천인들이 전쟁에서 공로를 세우면 신분 상승이 가능하도록 군 제대를 바꾸었다.

 
이 법이 시행되자 조선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고 일본군에 붙게 되었던 많은 조선 노비들이 돌아와서 의병에 가담함으로써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또한 국제무역을 하면 사형까지 시키던 법을 고쳐 조정이 손 놓고 굶어죽어가는 백성을 보고만 있을 때 국제 무역시장인 중강개시를 명과 협의 하여 개설했다.


이곳을 통해서 요동의 곡식이 들어오므로 굶어죽어가는 백성이 많이 살아난 것이다. 또한 이순신 장군과 권율장군을 천거해서 임진왜란의 극복에 앞장섰다.


규제를 풀고, 신분제를 해체하고, 군법을 바꿈으로써, 훌륭한 인물 등용에 앞장선  유성룡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1등 공신이 되었다.

 

드디어  정유재란 이듬해인 1598년 7월 풍신수길이 사망하자 일본군은 비밀리에 철군령을 내렸다.


명나라도 역시 조선에서 퇴각하는 일본군을 그냥 돌려보내자고 했으나  이순신에게는 마지막을 결심할 수 밖에 없는 일이 발생한다. 

 

그를 뒤에서 뒷받침해주고 후원해주었던 유성룡이 선조와 조정 대신에게서 공격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인 끝날 조짐이 보이자 선조와 조선 사대부들은 각종 개혁정책을 이끌던 유성룡을 끌어내리고 과거 체제로 복귀하려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파천에 반대하고, 세자책봉을 계청하고, 요동내부책까지 반대했던 유성룡을 선조는 제거할 대상으로만 바라본 결과였다.


결국 서애 유성룡이 파직 당하던 날, 1598년 11월 같은 날,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빨간 융복을 입고 퇴각하는 일본군을 공격하는 전장에서 진두지휘하다가 전사한 것이었다.


이로써 전란에서 아무런 교훈도 받지 못한 양반 사대부들은 자기 자신들의 당파적인 이익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고,그 결과 38년 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의병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결과, 임진왜란 후 또다시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을 맞게 된것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얻은 뼈아픈 교훈을 되살려 오늘을 살아가는데 거울로 삼지 못하면, 반복된 침략에 대해서나 반복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다.

 

 

4. 내 영혼을 뒤흔든 그 때 그 글귀들

 

1) 양명학과 주자학의 가장 큰 차이는 사민(사,농,공,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주자학은 사대부와 일반 백성의 신분 차이를 하늘이 정해준 이치라고 생각하는 반면 양명학은 사민평등을 주장한다. 

 

양명학은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의해서 직업이 결정된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2)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사신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인물은 동인인 김성일이다. 

 

그러나 사신 과정은 적절히 수행했으나 가장 중요한 결과 보고에서 실수하면서 두고두고 구설수에 휘말린다.

 

정사 황윤길(서인)이 일본인들의 무인기질에 겁먹었다면, 유신 김성일은 학문적 우월감으로 일본인들의 무인기질을 우습게 본 것이다.

 

3) 조정이 군사태세를 점검하라고 보낸 대장 신립은 자신의 위엄을 세우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자신의 위엄을 세웠다고 전한다.


4) 임진강에 다리가 없어 강을 건널 수 없다는 핑계로 남하가 늦어진 책임을 조선에 떠넘기려고 했던 명나라의 이여송에게 예상치도 못하게 유성룡은, 통나무가 서로 잇댄 것이 빗살처럼 강 위에 걸터앉아 활 모양 비슷한 둥근다리 하나를 튼튼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 뒤 그 위에다 가는 버드나무, 싸리, 갈대을 섞어서 펴고 흙을 덮었다. 임진나루에 부교를 만든 것이다. 

 

미국의 사학자 헐버트는 한국의 4대 발명품으로 금속활자, 거북선, 한글, 적교를 꼽았는데, 적교가 바로 유성룡이 만든 임진강 부교이다.

 

5) 유성룡은 전체를 조망하는 거시적 안목과 부분에 해박한 미시적 시각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행정에 박식한 관료이자, 군사에 통달한 병법가이고, 경제에 해박한 학자였고, 전란 극복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실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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